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킬 군항의 반란 (문단 편집) == 원인 == [[루덴도르프 공세]]가 실패하고 [[100일 공세]]가 시작되자 [[독일 제국]]은 [[협상국]]에게 평화 협정을 요청했다. 이때 즈음 사실상 협상국의 맹주격으로 떠오른 [[우드로 윌슨]] [[미국]] [[미합중국 대통령|대통령]]은 [[독일 제국|독일]]에게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도 중지하며 민주 정부가 아니면 협상하지 않는다."'''는 협상조건을 내걸면서 독일을 압박했다. 사실 독일의 상황은 저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그러나 독일 군부는 독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전쟁]]을 위해 물자를 더더욱 쥐어짰고 [[순무의 겨울|독일 국민들의 생활은 더더욱 피폐해졌다.]] 이러고도 독일이 무너져내리지 않은 건 연합군에게 포위되면서 독일 국민들이 독이 올랐기 때문이며 정말 엄청나게 정교할 정도로 물자를 효율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이 일어나기 거의 직전엔 독일 내 생필품 등 주요 물자 재고가 몇주분도 안 남은 상황이었다.[* 즉 다 굶어죽기 전에 전쟁을 끝냈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가혹한 조건을 강요한 것도 이런 독일의 상황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당시 독일 수뇌부가 굉장히 유능했다는 뜻도 된다. 국가라는 초대형 조직을 전쟁에 동원하는 데는 행정적 착오로 인해 동원되지 않는 물자나 인력 등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런 구멍이 없이 국가의 모든 자원이 완전히 동이 날 정도로 효율적으로 물자를 동원했다는 뜻이므로. --진짜 유능했으면 전쟁을 이 지경이 되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일선 [[장병]]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매우 극심했는데 독일 국민들은 언제나 [[보오전쟁]], [[보불전쟁]]과 같이 독일의 전쟁은 신속하게 적의 허를 찔러 적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아직 20세기식 [[총력전]]과 [[참호전]]의 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후방에 있는 이들에게는 무능한 군부가 전쟁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주제에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쥐어짜내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고 군부의 위치가 높은 독일 제국임에도 군부에 대한 신뢰와 경외는 날로 추락했다. 반면 현장에서 직접 [[참호전]]의 지옥을 헤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군인들은 무능하다는 매도를 들었으니 상호간의 불화와 갈등은 임계치에 달하고 있었다. 정말 전쟁을 조금만 더 끌었더라면 독일 제국은 물자의 부족과 내부의 갈등으로 내부로부터 완전히 무너져내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또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불기 시작한 [[공산주의]] 열풍과 전장의 악화, 그리고 무능한 제국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동맹국들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 그리고 [[불가리아 왕국]]은 전쟁을 견디지 못하고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고급 [[장교]]들이나 제국 각료들을 제외한 모든 독일인들이 제국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1918년 10월 4일 독일 [[의회]]는 이미 [[헌법|입헌]] 혁명을 선언하고 기존의 제국 의회를 해산한 후 [[입헌군주제]]를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미 독일의 상황은 그 정도로는 호전될 가망이 없었으며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이유에는 [[황제]] [[빌헬름 2세]]의 책략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시점에서 패전의 책임을 민주화된 정부에 떠넘김으로써 [[카이저]] 본인의 책임을 면해 보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정도만으로 수습될 상황이 아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